거시경제학이 등장하게 된 배경과 역사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고전학파의 보이지 않는 손
고전학파의 태두인 애덤스미스(A, Smith)는 시장의 자동조절기구를 신봉했습니다. 시장의 가격체계의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을 통해 수요와 공급은 자동적으로 조절되 어 균형에 이른다. 따라서 정부는 시장에 개입할 필요가 없이 단지 외부의 침입이나. 국 가의 질서를 위한 최소한의 개입만 허용합니다. 또한 그는 개인의 이기심이 보이지 않는 손을 통해 공익으로 전환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처럼 애덤 스미스에 의해 시작된 고전학파의 사상은 건전한 사회제도와 윤리관이 확립되어 있는 사회에서 모든 사람이 자신의 이기심에 따라 자유롭게 경쟁을 한다면, 시 장메커니즘의 '보이지 않는 손'을 통하여 국민경제 전체가 부와 번영을 누릴 수 있다는 생각을 기본 바탕으로 합니다.
시장에서 분필을 만드는 사람은 이 분필이 특정 학교의 선생님이 수업하는데 도움을 주고자 하는 이타적인 마음에서 생산하는 것이 아니고 분필을 시장에 팔아 돈을 많이 벌기 위해서 생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개인적인 이익이 보이지 않는 손을 통해 서 공공의 이익으로 전환될 수 있기 때문에 시장의 메커니즘을 신봉하였습니다. 특히 당시에는 공급보다는 수요가 많았기 때문에 상품이 언제나 부족했고, 만들면 모 두 팔렸기 때문에 재고를 걱정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공급은 스스로의 수요를 창출한다"는 세이의 시장법칙이 고전학파의 기본명제였다. 세이의 시장법칙에 따르면 경제의 총공 급은 총국민소득이 되며, 총공급에 의해 결정된 국민소득에 총수요가 자동으로 맞추어 집니다. 따라서 고전학파의 눈에는 수요측면이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산업혁명과 대량생산으로 인해 수요보다 공급이 크게 초과하자 기업의 재고 가 쌓이기 시작했고, 그 결과 공장 가동의 중단, 해고 등의 악순환이 일어났습니다. 급기야 1929년에 발생한 대공황 사태에 대해 고전학파 경제학자들은 해답을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의 기능이 언젠가 다시 되살아날 것을 기대할 뿐이었습니다.
대공황과 거시경제학
1929년 대공황의 등장은 경제사상의 혁명을 가져왔고 거시경제학의 등장으로 이어졌습니다. 1929년~1936년 사이의 미국을 비롯한 세계경제의 침체는 매우 이례적인 현상이었습니다. 당시의 재화와 서비스의 생산은 무려 30%나 감소하였고, 실 업률은 1929년의 3%에서 1933년 25%로 크게 상승하여 네 사람 가운데 한명은 실업자였습니다. 대공황으로 인해 독일에서는 히틀러의 나치가 정권을 장악했고, 미국에서는 루즈벨 트 대통령이 새로운 처방책을 내놓았습니다. 기존의 고전학파는 시장기구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보내고 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손이 작동하게 되면, 경기침체와 인플레이션이 자동 치유될 것이라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당시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커다란 파도로 침몰되어가는 타이타닉에 탑승한 것과 아 오랜 시간동안 기다릴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시장의 자기조절능력에 대한 회의를 불러 으켰으며, 이것이 영국의 케인즈(.M. Keynes)의 등장과 거시경제학의 태동을 불러왔습니다.
케인즈 혁명과 충수요관리 정채
케인즈는 1930년 경제학에서 가장 혁명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는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을 발표하였습니다. 경제의 자율적인 조절능력을 통해 성 장과 고용이 보장된다는 믿음을 접고, 당시의 비관적인 상황하에서 기업과 소비자들이 투자와 소비를 줄여 총수요가 감소하고 이로 인해 경기침체가 지속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를 탈피하기 위해서는 총수요를 끌어올리는 정부의 유수정책(펌프를 통한 물의 공급)을 통해 침체상태에 깊이 빠진 경제를 회생시킬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루즈벨트 대통 령의 뉴딜정책과 같이 총수요확대를 위한 재정정책(감세, 정부지출증가)을 총수요관리 정책이라고 합니다.
고전학파의 부활
케인즈 경제학의 사상이 전 세계를 뒤덮고 있던 당시 오일쇼크가 발생했습니다. 1973년과 1978년의 제2차례에 걸쳐 발생한 오일 쇼크는 정부의 총수요관리정책으로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오일쇼크로 인해 경기침체(국민소득의 감소)와 물가상승이라는 동시에 잡기 어려운 문제, 즉 스태그플레이션(agiation)에 직면하게 된 것입니다. 케인즈의 총수요관리정책을 사용하게 되면 경기침체나 인플레이션 중에서 어느 하 나는 치명적인 희생을 부담해야 했던 것입니다. 이때 다시 고전학파의 사상을 이어받은 통화주의학과는 수요측면만 고려하는 방법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공급측면을 강조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케인즈 사상의 계보를 잇는 케 인즈학파와 고전학파의 계보를 잇는 통화주의학파와 새고전학파는 시장을 바라보는 상 반된 견해로 치열한 논쟁을 벌이게 됩니다. 이처럼 상반된 두 견해를 놓고 어느 것이 더 옳 다고 단정하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결국 경제는 인간에 대한 탐구이기 때문에 어느 학파 든 심리와 기대가 중요하다는 점을 감안하면서, 장기적 관점에서는 고전학파의 시장기 구에 의한 접근방식이 설득력이 있고, 단기적 관점에서는 정부의 적극적 개입정책이 효 과가 있다는 선에서 적절히 타협을 하고 있습니다.
케인즈는 그의 저서인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에서 당시 주류경제학자들을 고전학파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엄밀히 구분하면 고전학파는 애덤 스미스부터 리카도, 세 이, 맬서스, 밀에 이르는 시기의 경제학자를 말합니다, 이후 19세기말 쿠르노, 고센, 제본 스, 왈라스, 거 등에 의한 한계혁명이 일어나면서 한계효용학파가 생겨났습니다. 마샬을 시작으로 고전학파를 계승하면서 한계효용 접근방법을 사용하는 경제학자를 신고전학파라고 합니다. 미시경제학에서는 주류가 신고전학파이며 거시경제학에서는 케인즈학파가 주류에 가까우므로 신고전학파를 고전학파에 포함시켜 생각하며 필요한 경우 신고전학파를 명시하기도합니다. 그리고 신고전학파는 최근의 새고전학 파 이전의 경제학자들이라는 점에서 새고전학파와 구별됩니다.
결론
거시경제학이 태동하기전의 고전학파, 대공황으로 인한 케인즈의 혁명, 오일쇼크로 인한 고전학파의 부활을 통해서 거시경제학이 어떻게 등장하게되었는지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